슬픔
위로받고 싶은 사람이 생길 때 비로소 슬픔은 완성된다.
한 고통에 묶여 다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중학교 때부터 20대 초반까지 써왔던 일기장을 꺼내 읽어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건 일기가 아니라 나에게 쓴 편지 같구나... 하는 생각. 어떤 날은 슬픈 나에게, 어떤 날은 기쁜 나에게, 또 어떤 날은 들떠 있는 나에게. 축하거나 위로하거나 하는 말들이 적혀 있었다. 학생일 때는 친구에게 쓴 것 같은 편지도 많았다. 그 시절에는 친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 싶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할 것이며, 몇 년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 등등의 내용도 적혀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는 많은 것을 꿈 꾸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도 한 것 같다. 서른 살 쯤엔 난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라는... 나는 충분히 나에게 만족하면서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때는.
토요일 오후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토요일 오후처럼 하릴없어지는 것이다. 꽃다발을 든 신부여, 가던 차에서 내려 욕설을 퍼붓고 그대는 억울하도록 상스러워지는 것이다. 골목마다 막히기만 하는 것이다. 쉬워지고 우스워지는 것이다. 보지 않을 수 있지만 듣지 않을 수 없는 것, 먼지로 뒤덮인 한 꺼풀의 귀지를 죽을 때까지 껴입는 것이다. 익어가는 열매처럼,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순간 몸을 던지는 것이다. 하품 끝에 눈물이 어리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토요일 오후처럼, 마지막에 오는 것, 마지막에 찾아오는 공황 같은 것이다. 꽃다발을 버린 신부여.
일기를 쓰지 않은진 오래 되었다. 어느 날 일기를 쓰고, 다시 읽어보면서 나는 나에 대해서 놀랐더랬다. 그 일기에는 내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다. 누구에게 보여줄 것도 아닌데 나를 아주 많이 꾸며 쓰고 있었다. 가장 개인적인 공간인 일기장에서도 나는 진실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 속에 때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는 일기장을 열지 않았고, 나에게 쓰는 편지도 거기서 막을 내렸다.
파도
잃어버린 심장이여
잃어버린 심장이여
잃어버린 단 하나의 심장을 향한
내 인생의 미친 혈관들이여
피리소리여
내 생명의 무너져 내리는 동맹이여
어떤 방식으로든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인 듯 싶다. 지금까지도 내가 나에게 쓰는 일기를 멈추지 않았다면 나는 조금 더 나다운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도 충분히 나다운 방법으로 지금을 살고 있지만, 가끔씩 밀려오는 이 허전함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삶에 걸림돌이 없더라도 그것이 곧 행복한 삶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제 충분히
우리는 이제 충분히 아름다워졌소. 층층마다 빛나는 램프를 걸어놓은 빌딩들처럼, 우리는 더이상 앞으로 나아갈 필요가 없소. 장물은 늘 넘칠 만큼 있소. 발뒤꿈치를 모으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주문을 한번 외우고 나서 우리가 납치한 것을 믿으면 되는 일이라오. 우리의 견인넘버는 자꾸만 길어지겟지만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견딜 수 없는 불편이란 없소. 그뿐이오.
우리는 이제 너무 아름다워져 다른 것을 알아볼 수 없소. 한치 앞도 여기에 덧붙일 수 없소. 층층이 올라가는 빌딩들처럼 우리는 우리 발에 걸려도 넘어지지 않소.
올겨울의 마지막 눈발은 땅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이르지 못하고 허공에서 녹아버렸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공중곡예가 남아 있었습니다. 죽는 순간에, 한눈을 팔고 싶었습니다. 도시의 입간판들이 환호를 보내고 못생긴 길들이 이렇게 낯익었는데, 쓸데없는 지체를 하고 싶었습니다. 지독한 땅거미가 도시의 허리를 감고 있어서가 아니라, 베란다에 널어놓은 하루가 혓바닥을 내밀어가며 모든 먼지를 삼켜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외진 골목마다 입주를 권하는 현수막이 나부껴서가 아니라, 그저, 어지러운 안착의 한 모서리에서 당신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아니라, 단지 지상에 이르는 길이 뜨거워, 너무 뜨거워 녹아버렸습니다. 한눈을 팔아버렸습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과 마음이 곳곳에서 증발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낯익은 길들 위에서.
- 진눈깨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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