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여름이 언제 떠날까. 생각했다. 그런데 보니, 이 여름은 이미 저 뒤에서 다음 여름을 위해 몸을 달구고 있지 않은가. 이제 살 것 같아, 라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소리쳤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날, 밖으로 나가 시원한 카페를 전전하던 때, 이 책을 만났다. 제목과 겉표지 때문에 손에 잡혔던 것 같다. 처음에는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읽다가 이 책을 사고 말았다. 정말 갖고 싶어서! 오랜만이다. 이렇게 갖고 싶었던 책은.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내가 품었던 감정이, 이 책에 대한 믿음 같은 것이 옳았다는 것을 알았다. 두고 두고, 매년 여름이 올 때쯤에 다시 꺼내 읽게 되지 않을까.
나는 집에 대해 크게 생각한 적이 없다. 어릴 적에도 나이가 들은 지금도,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건축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라는 책을 읽으면서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릴 때는 한옥, 그 후론 빌라, 아파트에서 줄곧 살았던 것 같다. 지금 사는 이 아파트가 얼마나 삭막한 곳인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책 속에 나오는 여름 별장을 머릿속에 잘 그려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복잡한 도시의 아파트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책 속에 등장하는 이름모를 별장들을 그려보려고 애썼다. 천천히 읽으면서.
이야기는 이 글의 화자인 '나' 사카니시 도우루가 무라이 설계 사무소에 입사해, 여름 별장으로 떠나게 되면서 시작된다. 무라이 설계 사무소는 '무라이 슌스케'라는 노건축가가 운영하는 곳이다. 사카니시가 무라이 설계 사무소에 들어가고 싶었던 이유는 무라이 슌스케 때문이었는데,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닮고 싶은 건축가이기 때문이었다. '나'가 더이상 신입사원을 뽑지 않고 있던 무라이 설계 사무소에 들어가 일하게 된 건 우연이었을까.
무라이 설계 사무소는 도쿄에 있었지만, 여름이 되면 아오쿠리란 마을에 있는 '여름 별장'으로 사무소를 옮겨 일한다. 이 여름 별장은 무라이 슌스케의 별장이다. 갓 스무살을 넘긴 '나'는 '여름 별장'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스승과 함께 한 계절의 여름을 보내게 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여름 별장'이 있다. 여름은 뜨겁고 화려하지만 별장의 숲은 그 여름을 품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래서일까. 잔잔하게 읽히지만 그 여운은 강렬하다. 선생님의 마지막 플랜이 될 수도 있는(결국 마지막 플랜이 된) 국립현대도서관 경합을 위한 설계도 작업이 여름 별장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별장에서 진행되는 작업은 경합이 주는 치열함 보다는 클래식을 듣는 것처럼 부드럽게 느껴진다. 그건 도심의 콘크리트 속 사무실이 아니라 숲 속의 별장이라는 장소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진 선생님(무라이 슌스케)은 자신이 온 힘을 쏟아부은 마지막 플랜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나'는 대단하고 획기적인 설계라도 모형으로만 존재한다면 잊혀지는 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시대와 시간을 지나쳐버린 선생님의 국립현대도서관 모형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는 일과 사랑, 스승에 대한 존경이 머물렀던 그 여름의 별장에 다시 숨결을 불어넣어 보겠다 다짐한다.
중심이 되는 이야기는 건축이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들이 많다. 책을 읽으면서 간혹 스콘이 먹고 싶다든지, 홍차가 마시고 싶다든지, 야채가 듬뿍 들어간 요리를 해먹고 싶다든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또한 반딧불이가 갑자기 보고 싶어지고, 세익스피어 전집을 사서 읽어 보고 싶기도 했다.
책의 두께만큼 읽는데 시간이 걸렸다. 모르는 용어도 많이 나왔고 묘사도 많다보니 머릿속으로 그려보는데도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도가 더디 나가는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책은 그렇게 읽어야 되는 책인 것 같아서 였다. 어떻게 이런 다양한 지식을 가지고 있을까. 작가에게 존경심마저 드는 그런 책이었다.
어느 여름에 다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그 때 또 느낌을 적어보고 싶다.
“잘된 집은 말이야, 우리가 설명할 때 했던 말을 고객이 기억했다가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들에게 그대로 전달하게 되지. 우리 건축가들의 말이 어느 틈엔가 거기 사는 사람들의 말이 되어 있는 거야. 그렇게 되면 성공이지.” p. 60
목소리란 참 이상하다. 목적도 마음도 그대로 드러난다. 유키코의 온갖 것이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것 같고 그 모든 것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사람을 잘 설득한다. 귀에 쉽게 들어오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설명으로는 다 할 수 없는 부분이 남는다. 그 조금 남아 있는 것이 사람을 매료시킨다. 말의 의미 그 자체보다도 소리로서의 목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게 아닌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유키코의 목소리가 들리면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유키코의 목소리를 모아두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p.60
선생님 건축에 들어서면 아무도 큰 소리를 안 내게 되지. 마음이 포근해지는 축감이라든가 부드럽게 들어오는 광선이라든가 늘 쓰는 사람이 한참 지나서 겨우 알아챌 수 있는 장치들은 소곤소곤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것이나 같으니까, 사람 목소리도 거기 맞춰 작아지지. p.81
“선을 그을 때 무의식적으로 숨을 멈추잖아? 그게 잘못된 거야. 누구나가 빠지기 쉬운 착각이지.” (…) “숨을 멈춘 순간 근육은 단단하게 긴장하지. 천천히 숨을 내쉬면 근육에서 힘이 빠져. 심호흡을 하면 릴랙스한다는 것은 그런 얘기야. 그러니까 천천히, 힘주지 말고 숨을 쉬면서 선을 긋는 편이 팔 상태가 안정된다고.” p.146~147
왜 사람은 잡초만 깎아도 이렇게 상쾌해지는 걸까. 울퉁불퉁한 땅보다 펀펀하게 고른 편이 아름답게 느껴진다. 콘크리트 마감도 보기에 나쁘지 않다. 평평한 면을 인간이 좋아하게 된 것은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인간이 처음 본 평평한 것 바람 없는 날의 호수, 파도가 쓸고 간 모래사장, 얼어붙은 물웅덩이. 내 청바지와 티셔츠에는 주름이 가고, 풀이랑 잎사귀의 초록색 파편이 달라붙어 있다. p.161~162
예전에는 만원 전철이 크게 커브를 돌면 가죽 손잡이가 일제히 끽끽거렸지. 그런 소리는 나쁘지 않거든.
저녁 무렵에 덧문 닫는 소리가 들리면 이제 밤이 시작된다는 기분으로 바뀌었지. 예전에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밖에서 놀던 아이들도 덧문이 덜컹덜컹 움직인ㄴ 소리가 나면 서둘러서 집에 돌아갔었지. p.234
움막이라면 아주 잠시라도 밖을 바라보기도 하고 불을 멍하니 보는 여백 같은 시간이 있었을 거야. 인간에게 마음이 싹튼 것은 그런 시간이 아니었을까. p.337
정말로 죽기 살기로 억지 부리는 사람은 얼마 없어. 대단한 탁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남이 이렇게 생각하니까, 세사아이 이런 것이니까, 그런 정도의 생각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야. 그런 사람들은 이쪽이 각오만 섰으면 밀어붙일 수가 있지. 물론 어디까지나 자기 아집을 관통시키려는 사람도 있어. 그런 때 건축가로서의 신념이 문제가 되는 거야. 그 자리에서 자기 생각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가는 평상시에 어떻게 해왔느냐의 연장선상에 있어. 여차하면 저력을 발휘할 생각으로 있어도 평상시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갑자기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p.354
사람한테는 주어진 시간이 있다고 생각해요. 얼마나 시간이 남아 있는지 자기는 모르지만 그 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와요. 나는 매일 아침 오늘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다, 내일이 이 세상하고 하직하는 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젊은 사람은 그런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만 사실은 똑같아요. p.366
건축은 준공되고 나서 비로소 생명이 부여된다. 나는 어느새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건축은 이용객과 그 시대에 의해 숨결이 부여되고 살아난다. (…) 선생님의 국립현대도서관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그대로 흘러, 지나간 세월은 이 모형에 사소한 숨결조차 부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 플랜의 가치가 훼손된 것은 아니다. 선생님 플랜에 생명이 불어넣어지지 않았을 뿐이다. p.415
이 여름 별장은 다시 한 번 자네가 새롭게 만들면 돼. 탁해져서 움직이지 않게 된 현실에 숨결을 불어넣으면 되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선생님이 언젠가 하신 말씀이 그때의 음성 그대로 내 귀에 되살아난다.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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