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차를 잘 마시지 않는다. 마신다면 한겨울쯤의 어느 날이 될 것이다. 차가 싫어서가 아니라 커피에 더 익숙해져 있어서 일거다. 차를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는 일. 내게도 어울리는 일일까. 그건 어쩐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일일 것만 같다.
차의 기분이란 책. 어느 블로그에서 보고 찾게 되었다. 차의 기분이라니. 어떤 책일까 궁금했다. 차를 만지고 보고 마시며, 차와 가까이 지내면서 차와 함께 쓴 글. 잔잔하면서도 곧은 힘이 느껴졌다. 책을 덮고는 괜시리 차를 생각하고 차를 마시고 싶어졌다.
푸르른, 푸른 녹차를 마시고 싶었고, 그보다 더 초록인 옥로를 한잔 우려보고 싶었다. 갑자기 마시지도 않는 홍차가 그리워지기도 했다. 얼그레이 홍차와 함께 영국의 거리를 떠올리게 됐고, 우수에 젖고 싶을 때 다즐링 세컨드 플러쉬를 찾아봐야지, 하고 생각했다. 이름도 어려운 이 차를.
사색은 공부나 연구보다는 관조나 명상에 더 가깝다. 하나의 생각에 몰입하기보다 생각이 이리저리 흐르고 흩어지도록 방치하는 것. (…) 사색하는 인간이었던 니첸ㄴ 초인을 상상했고 세잔은 사물의 향기조차 볼 수 있노라 선언했다. 이들 사색하는 인간들의 공통된 취미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산책이고, 하나는 차 마시기다. (p. 41)
찻잔이 비었다고 성급히, 찻잔에 차를 다시 채워서는 안 된다. 비 갠 후 꽃의 향이 진해지듯 차향도 차를 삼킨 후에야 진해진다. 빈 찻잔을 보며, 가만히 있는 시간이 는다. (p.44)
수천 년 차를 마셔온 중국인들은 마침내 다우를 만나게 된다. 차를 마실 때 중국인들은 토끼나 두꺼비, 동자승 같은 자신만의 도자기 인형을 두고 마신다. 다우는 바로 – 자기 자신이었던 셈이다. (p.62)
보이차를 마시면 예전엔 내가 나무였다는 것을 안다. 나는 보이차를 흡수해서 한결 싱싱해진다. 마른 입술에 윤기가 돌고 풀 향이 난다. 창백한 뺨에 홍조가 일고 손바닥과 발바닥에 땀이 맺힌다. 손바닥은 잎맥을 닮았다. 그물처럼 가늘게 연결된 파란 혈관을 보노라면, 인간도 광합성을 하며, 단지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생각도 든다.
두 팔이 어서 하늘에 닿았으면, 아니 그보다 뿌리를 내려야지. 부드럽고 신선한 흙이 내 발목을 감싸줬으면. 꽃을 피웠으면, 이렇게 따뜻할 때. (p.107)
옛날 중국의 한 마을에 역병이 돌았는데, 이 차를 마시고 병이 싹 나았다고 한다. 그러니 이 차가 관음이 아니겠냐고 한다. 찻잎이 철처럼 무거우니 철관음이 아니겠냐고. 여러 번 마시면 믿게 된다.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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