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시절 무슨 시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우주에 관한 수업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우주 어느 공간에 우리가 빛의 속도로도 갈 수 없는 그런, 상상도 할 수 없는 머나먼 그런 곳에 나와 같은 자아(주관, 자의식, 에고, 자아의식)를 가진. 그러니까 ‘나’가 살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
그 이후로 그런 생각은 내가 등장하는 꿈을 꿀 때마다 가끔씩 떠오르곤 했다. ‘나’와 ‘나’가 만나는 공간은 꿈 속일지 모른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어젯밤 꾸었던 괴상한 일들을 기억해 내던 날들이 있었다.
난 지금도 우주 어딘가에 쌍둥이 개념이 아닌 온전한 ‘나’, 내가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터무니없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상상을 해보는 것, 그 자체가 재미있는 일 아닌가.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7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져있다. 난 단편은 재미있는 것만 몇 개 골라서 읽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집에 실린 7편의 단편은 정말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내가 상상했던 그런 세계라고 할까? 소설 속의 세계가. 그런 세계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풀어가는 방식이 놀라웠고, 감동도 있고 생각할 거리도 있었다. 다 읽었을 때 허무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 앞으로 내가 살아갈 세계, 그리고 내가 없어진 후의 세계까지, 무엇인가 풍성한 세계가 내 생각 속으로 들오는 것 같았다. 좀 많이 놀라운 소설이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단편은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였다. 단편 소설집은 처음부터 읽는 것이 아니라 읽고 싶은 것을 먼저 읽다보니 차례 첫 번째에 있던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를 맨 마지막에 읽게 되었다.
열여덟 성년식을 맞은 아이들은 순례를 떠난다. 시초지라는 곳. 그 시초지로 떠난 순례자들은 1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는데, 돌아오는 사람의 수는 늘 적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은 곧 잊혀졌다.
아무런 편견, 아무런 고통도 없이 ‘행복’ 만으로 살고 있는 이곳으로 사람들은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 걸까.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 최초로 의문을 품은 데이지라는 소녀가 성년식 전에 시초지로 떠나고 그러면서 알게 되는 사실들. 시초지는 바로 ‘지구’였다는 것. 그곳은 지구 밖의 ‘마을’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고통, 갈등, 불행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곳엔 행복은 물론 ‘사랑’도 있다. 완전한 보호를 받고 살아가고 있었던 지구 밖 ‘마을’ 사람들이 어째서 지구를 선택했을까. 지구에 남기를 결정한 사람들은 어떤 이유에서 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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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했어. 당신의 마지막 연인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겠냐고. 나는 그에게 지구로 다시 함께 가겠냐고 물었어.
떠나겠다고 대답할 때 그는 내가 보았던 그의 수많은 불행의 얼굴들 중 가장 나은 미소를 짓고 있었어.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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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적어도 그때는 같은 하늘 아래 있었지. 같은 행성 위에서, 같은 대기를 공유했단 말일세. 하지만 자금은 심지어 같은 우주조차 아니야. 내 사연을 아는 사람들은 내게 수십 년 동안 찾아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네. 그래도 당신들은 같은 우주 안에 있는 것이라고. 그 사실을 위안 삼으라고. 하지만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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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를 유유자적 유영하는 재경 이모를 상상하는 것은 우주에 있는 이모를 상상하는 것보다 차라리 쉬웠다. 심해로 내려간 재경 이모. 그건 너무 아득하고 비현실적이어서 오히려 아무렇게나 그려도 될 것 같은 그림이었다. 이모는 새로 단 아가미로 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까마득한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따라 헤엄치겠지. 그러면서 지상에서 일어나는 이 모든 한심한 일들을 마음껏 비웃고 있을 것이다. 가윤은 그곳의 깊은 어둠이 우주와도 닮아 있으리라고, 그래서 이모는 망설임 없이 바닷속으로 떠났으리라고 생각해보았다.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p31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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